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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9 故 조계창 기자를 아시나요? (2)
언론인 열전2010.06.29 22:12

중국 심양특파원’그의 마지막 직함이었습니다. 그는 <연합뉴스>의 기자였습니다.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제가 그를 소개해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부지런한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이 쓰는 기사에 대해 공부합니다. 늘 시간의 싸움을 해야 하는 통신사 기자들에게 기사 하나 하나에 정성을 쏟는 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신문과 방송을 회원사로 두고 있을 때는 그나마 좀 수월했었습니다. 하지만 포털이 등장하면서 <연합뉴스>의 기자들은 시간과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합니다. 무엇보다 ‘속보’의 중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연합뉴스>는 매체들을 상대로 기사를 서비스 하는 통신사입니다. 국내에는 <연합뉴스>와 <뉴시스>가 대표적입니다. <AP>, <AFP>, <로이터>, <교토통신>, <신화통신> 등도 <연합뉴스>와 같은 통신사입니다. 원래 연합뉴스의 직전 이름은 <연합통신>이었습니다. 1980년 12월 19일 창립한 <연합통신>은 8년 뒤 <연합뉴스>라는 명칭으로 사명을 바꿉니다. 사명을 바꾸게 된 이유 중에 기자들이 일선 취재현장에서 취재원을 만날 때 매체이름 때문에 기자들이 KT와 같은 통신자 직원으로 오해받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YTN>도 연합뉴스에서 분리된 언론사입니다.

 <연합뉴스>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시간 때 우리가 보는 인터넷 기사의 대부분을 연합뉴스가 차지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예, 스포츠, 그리고 시사관련 전문 인터넷매체가 잇따라 창간하면서 포털뉴스에도 연합뉴스 이외의 다른 매체들의 기사를 볼 수 있지만, 낮 시간 때 인터넷에서 <연합뉴스>의 뉴스의존도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는 제 기억으로 1998년 <연합뉴스>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이듬해에 호남취재본부 전북취재팀으로 부서가 바뀝니다. 제가 그를 만난 것도 그 무렵입니다. 학부생이었던 저는 우연한 기회가 취재를 나온 그를 알게됩니다. 소개를 통해 알게된 그는 털털했습니다. 주머니 속엔 늘 잡동사니로 가득했습니다. 그가 타고다녔던 차에는 자료더미가 한가득이었습니다. 집 나온 고시생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TV에서 봤던 기자들과는 너무나 천지차이였습니다. 첫 인상은 그랬습니다.  

그와 몇 차례 만남 뒤, 자연스럽게 그를 ‘선배’라 불렀습니다.(언론사에서는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먼저 입사하면 무조건 선배입니다.) 때로는 취재원 노릇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언론사 입사 준비를 위한 쪽집게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취재를 나갈 때 함께 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 때부터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기사를 쓴 뒤에도 자신이 기사에 썼던 취재원들과도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는 여가시간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습니다. 주말에 호출이 와서 나가면 같이 가는 곳은 늘 취재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하나씩 배웠습니다. 당시 저는 한 매체의 학생기자였던 저는 그에게서 기자되기 공짜 과외를 받은 셈입니다. 제가 쓴 기사 하나 하나를 제일 먼저 읽어주는 독자였고, 데스크였습니다. 늘 기사작성과 관련해 조언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덕에 학부생 때부터 경찰청 기자실 구경을 제법 했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제게 일종의 ‘모델’이었습니다.  

법조기자를 하던 조계창. 그는 늘 전화기를 귀에 꽂고 살았다. 쉬는 날에도 그의 전화기는 멈출 때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들으려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게 형의 마지막 사진이 될줄이야...

 2001년 다시 서울로 발령이 난 뒤, 예전처럼 끈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법조기자가 됐기 때문입니다. (법조기사는 검찰청을 출입하면서 온갖 법과 관련해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는 기자들을 말합니다.) 이메일로 안부를 전할 때도 그는늘 절 훈계했습니다. 머리가 조금 커져 그의 훈계가 ‘잔소리’마냥 듣기 싫을 때도 있지만 고마웠습니다. 그는 저와 잠깐동안의 인연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늘 걱정해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오지랖이 넓었습니다. 잔정도 많았습니다. 서울에 갈 기회가 있으면 늘 저녁이라도 사줘야 직성이 풀리는가 봅니다.

2002년 제가 첫 직장을 잡았을 때 누구보다 축하해줬던 것도 그였습니다. 온전한 언론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축하한다며 성균관대 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언론관련 책을 한보따리 선물해주곤 했습니다. 제가 고시원 생활할 때 자신의 집에서 이불을 가져오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그런 따뜻함은 제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자가 되려고 먹었던 언론계의 후배들에게 자신의 따듯함을 베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법조기자를 마치고 간 부서는 민족뉴스취재본부였습니다. 자원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그의 꿈은 최고의 북한전문기자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북한관련 대학원을 지원했습니다. 책읽기에도 넉넉한 시간이 아닐텐데도 미디어에 대한 고민, 기사에 대한 고민, 북한에 대한 고민은 뜨겁다 못해 폭팔할 지경이었습니다. 자신도 살기 바쁠텐데 오지랖 넓은 그는 후배들 챙기는 것을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는듯 했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언론사에 들어간 뒤 그에게 연락을 자주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제가 한 차례 다시 직장을 막 옮겼을 즈음에 그는 제게 “중국 선양특파원으로 간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귀국할 때까지 회사 옮기지마라”고 또 잔소리를 했습니다. 이제는 적응이 됐는지 그의 잔소리도 가족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간혹 그가 썼던 기사를 보면서 피식 웃곤했습니다. 어떻게 취재했을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됐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았던 멀티플레이 기자였던지라 디카와 캠코더는 그의 필수품이었습니다. 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취재장비, 잡동사니로 가득한 주머니, 외모에는 큰 신경을 쓰지도 않고 기사 욕심에만 일등인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우연하게 그가 심양특파원을 하고 있을 당시 중국에서 만난 한 후배를 알게됐습니다. 중국매체에서 일했던 후배의 전언에 의하면 “그렇게 열심인 특파원은 본 적이 없을 정도다”라고 합니다. 중국이란 땅이 넓기도 넓지만, 중국정부의 취재제한 또한 만만치 않은 문제였는데 말입니다. 특히 북한관련 취재를 하려고 하면 우리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정보기관에서 일종의 ‘사찰’같은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느날 지인을 통해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08년 12월 2일. 머리 속이 멍해졌습니다.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며칠 뒤 그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를 처음 알게됐을 때 서로 나중에 훌륭한 기자가 돼 다른 언론사에 이름이 실리는 상상을 하곤 꿈을 키우자고 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이름을 날리기도 전에 ‘부고’를 통해 다른 언론사의 기사로 등장했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교통사고였습니다. 정보가 통제된 중국인지라 정말 사고인지 의심도 됐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지라 북한에 대한 기사를 써보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꼭 확인을 해보려 했던 사람이었기에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취재장소가 연변 조선족자치주였습니다. 북한 관련 취재정보를 모으기에도 좋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중국매체에서 일했던 후배의 전언도 비슷했었습니다. 머리속엔 의혹이 가득하지만 제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동안 받기만 했지 그에게 제대로 베푼 적도 없었습니다. 그가 떠난지 벌써 1년하고도 6개월이나 지났습니다.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는 그랬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 ‘기자’는 자랑스럽습니다. 사후 그에 대한 다른 언론들도 같은 평가입니다. 사후 그와 관련된 기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선양서 별세한 연합뉴스 조계창 기자 '진정 발로 뛰는 기자였다.!”
“기자정신 되새기게 한 당신을 기리며…”
치열한 기자정신 남기고 간 故 조계창 기자
'기자정신 남기고' 조계창 연합 선양특파원 별세
법조언론인클럽상 특별상 故 조계창 기자 수상
한국기자상 공로상에 故조계창 기자
고 조계창 특파원, ‘최병우 기자상’ 수상자로 선정

 생전에도 사내 특종상을 20차례나 독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언론사 뿐만 아니라 그가 언론인으로 보여온 행적은 모범이었습니다. 기자정신이 투철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포스팅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두 아이(조현진, 조태경)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아이들에게 아빠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컸을 때 자신의 아빠가 어떤 기자였는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짧은 글로 그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설픈 글실력으로 그를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의 마지막까지도 발로 뛰며 땀 내음 물씬 풍기는 기사를 썼습니다. 기자로 10년을 살았던 그. 어떻게 보면 짧지만 그가 남긴 울림은 메아리처럼 지금도 우리 언론계에 또렷하게 들립니다.  [조계창 기자 생전 마지막 기사와 댓글들] 

한 번도 그에게 해보지 못했던 말을 해보렵니다. 아직까지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게 형이자 언론계 선배이자 인생의 선배였습니다. 늘 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슴이 뜨거운 기자였습니다. 
“계창이형, 형은 진정한 기자였어. 형이 자랑스러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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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디어CSI